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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단편

[슙홉] 음주 (+감기)

160208 + 160207

 

술도 잘 못마시는 인간이 민윤기 하나 이겨보겠다고 술을 이렇게까지 퍼마시고 앉아있으니, 그걸 앞에서 지켜보는 윤기의 머릿속에는 한심함과 약간의 즐거움과 알 수 없는 불안함 같은 것이 존재했다. 맥주 500cc 한 잔에 소주 세 잔 정도 마신 것 같은데, 도대체 얼마나 술이 약한거야 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윤기를 호석은 잔뜩 꼬인 발음으로 조용히 불렀다.


"혀엉..."
"왜."
"나느은.. 왜.. ㅇ.. 왜 형을.. 몬이길까요..?"
"니가 날 어떻게 이겨 임마."
"...아, 이길 수 이써요!!"
"방금은 못 이긴다며."
"아이, ㄱ.. 그거느은! 지금까지의! 어? 전적.. 전적이라는거죠오!!"


안 그래도 목소리가 큰 편인 호석이 술에 취해 자제력을 잃고 크게 소리치는 바람에 주위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강제로 닥치게 할 수도 없고. 진짜 한숨 밖에 안나오는구만.


"야, 너 가만히 있어."


취해서 눈도 똑바로 못 뜨고 테이블에 엎드려 끄응.. 하는 소리를 내고 있는 호석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혹여나 이상한 짓을 할까 최대한 빠르게 계산을 끝내고 돌아왔지만, 다행히도 호석은 여전히 테이블에 그대로 엎드려있었다. 사람 귀찮게 하는 녀석이다 싶지만 술만 안 마시면 정말 좋은 동생이고, 착하고 싹싹한 사람이기에 윤기는 꾹 참고 그를 어떻게든 처리해야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일단 나가자."


호석의 팔을 잡아 억지로 어깨에 두르고는 가게를 나온 윤기는, 사실 호석의 집도 몰랐지만 그렇다고 술이 깰 때까지 밖에다가 그냥 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라 호석을 데리고 자신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자취방에 도착할 때까지 윤기는 핸드폰에 택시비가 얼마였는지, 술값은 얼마였는지 정리할 뿐이었다.


"왜 이렇게 무거워!"


윤기는 취해서인지 호석이 보기와는 다르게 꽤나 무겁다는 생각을 하며 침대에 눕혔고 호석이 입고있는 가죽자켓이 불편해보여 자켓을 벗겨주려 다가갔다. 자켓의 앞섬을 잡아 벗기려던 순간, 강한 힘에 의해 윤기의 몸이 침대쪽으로 당겨졌고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한 사람의 눈빛은 굉장히 슬펐고, 한 사람의 눈에는 당황스러움만이 가득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야말로 정적과 함께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약간의 움직임과 동시에 슬픔이 가득했던 눈빛은 한 순간 놀라움으로 변했고,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던 눈에는 장난스러움과 약간의 기쁨이 차올랐다.


*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지만 격렬했던 밤을 보낸 후 아침까지 줄곧 눈을 감고 있어도 잠에 들질 못했다. 계속 온몸이 뜨겁고 머릿속이 복잡해 잘 수가 없었다. 자신만 좋아하고 있다고, 저쪽은 그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우정이라는 방식의 호감만 있을 것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살갑게 대하는 것처럼 무뚝뚝한 자신에게도 똑같이 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다. 옆에 누워 곤히 잠든 호석도 자신도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여서 자신이 뒤척일 때마다, 호석이 뒤척일 때마다 맨살이 닿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다시 밤의 일이 생각나 몸이 달아오름과 동시에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그를 등지고 누웠다. 그걸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아침이 된 것이었다.

몰려오는 피곤함에 한숨을 쉬고 몸을 움직여 베개대신 팔을 베고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밤의 일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 미동도 없는 호석의 얼굴은 차분히 감긴 눈도 오똑한 코도 왠지 귀여워보이는 입술마저도 맘에 쏙 들었다. 얼굴을 보고있자니 그의 예쁜 이마를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이 신경쓰였다. 꽤나 많이 내려와 있는 앞머리를 조심스레 넘겨주자 그는 아..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가 폈다. 이런 소리마저 자극이 되니 큰일이었다. 며칠 간 눈도 못 마주칠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며 윤기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도록 하면서 이불에서 나와 욕실로 향했다.


"혀엉..."
"왜."
"나 머리 아파요. 이마 만져봐요, 열 나는 것 같아."
"열은 무슨."
"아, 만져봐요 빨리."
"아, 몰라 임마. 빨리 따라오기나 해."


자신의 자취방과 지하철 역이 꽤나 떨어져 있어서 윤기는 호석을 데려다주려 함께 밖에 나왔다. 춥다 라는 말만 반복하며 자꾸 시선을 피하고 앞장서서 걷는 윤기를 이상하다 여긴 호석이 단숨에 뛰어가 윤기의 앞에 마주보고 섰다.


"뭐에요?"
"뭐가."
"왜 피해요?"
"아닌데?"


무슨 소릴 하는거야. 하고 투덜거리며 또 다시 앞장서서 걷는 윤기의 뒷모습을 보며 걷던 호석은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결국 설마 나랑 잔 걸 후회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고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하지만 앞장 서서 걷고 있는 윤기가 그걸 알리는 없었고 두 사람의 거리는 조금씩 멀어졌다. 호석은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윤기의 뒷모습만 바라보다가, 그와 멀어지는 것이 두려워 윤기에게 달려가 양팔로 그를 꼭 안았다.


"아... 나 형 이길 줄 알았는데."


윤기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나지막이 속삭이듯 꺼낸 그 말은 오롯이 윤기를 향한 말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긴다 라는 목적 이외에 무언가 다른 의도는 없다고 볼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윤기에게는 확실하게 전해졌다. 그가 자신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고, 그 또한 자신이 그를 바라봐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윤기의 허리를 가만히 감싸안은 호석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지고, 그 떨림을 통해 그의 불안함이 고스란히 전해져 와 윤기는 조용히 호석의 손을 감싸쥐었다. 그리고 조용하게, 낮은 목소리로 그러게 누가 그렇게 많이 마시래. 하고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했다. 호석을 혼내는 말의 내용과는 다르게 그의 목소리에는 따스함과 다정함이 묻어져 나오는 듯 했다.


*


"그러게 내가 이불 제대로 덮고 자라고 했어 안했어."
"제대로 덮었어요! 잠들 땐!"
"..하. 아니면 옷을 좀 입고 자던가."
"불편하단 말이에요. 걸리적거리고."


환절기라 어김없이 감기에 걸린 호석은 자신에게 잔소리를 하는 윤기가 얄미웠다. 감기가 걸리고 싶어서 걸리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밤에 안 재운 것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 말을 했다가는 오늘 밤도 굉장히 길 것이 분명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려 카페 밖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약은."
"네?"
"약 먹었냐고."
"아, 안 먹었어요. 그냥 약 먹는거 싫어해요."
"아픈 주제에 싫고 말고가 어딨어."


그렇게 말하며 윤기는 가방을 뒤적거렸다. 밖을 바라보던 호석의 귀에도 달그락거리며 뒤적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라 무언가 찾는 거라도 있나 싶어 호석이 윤기를 바라봤다.


"뭐 찾아요?"
"잠깐만."


그렇게 가방의 주머니 하나하나를 뒤지던 윤기가 가방 가장 안쪽에 고이고이 넣어져있던 하얀 약봉투를 꺼냈다.


"하루 세번, 식후 30분."
"..이게 뭐에요..?"
"보면 모르냐. 아, 나 가야된다. 먼저 간다."
"네? 어디가요!!"


자기 할 말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윤기는 호석에게 손을 흔들며 간다, 나중에 보자! 하고 카페를 나가버렸다. 이게 무슨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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