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for. ETA
공원 벤치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힌 지민이 연기를 뱉어내며 벤치에 등을 기댔다. 멍하니 먼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듯 하다가도 입이 심심해지면 손을 들어 한 모금 쭉 빨아들이고는 다시 재떨이에 손을 올렸다.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하나 그런 생각도 하고, 그냥 뒤질 걸. 그런 생각도 했다. 그런 생각만 하고 있는 자신을 보고 있자니 허무함에 웃음이 나왔다. 본인 스스로를 비웃는 그런 웃음.
"뭐하냐, 혼자."
"담배를 꼭 누구랑 같이 피워야되나."
"그러네."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소리는 들었지만, 굳이 쳐다보지는 않았다. 회사 안에서도 피울 수 있는 담배를 굳이 공원까지 와서 피우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었기도 했고, 그 특유의 향이 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털썩 하고 앉으면서도 소리 하나 내지 않는 가벼운 움직임. 마치 고양이같았다. 슬쩍 고개를 돌려 쳐다보면 지민과 같은 담배를 꺼내 어느새 라이터를 꺼내는 호석이 있었다. 또 먼저.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는 뜨거운 시선에 눈을 한 번 맞춰주고는 약하게 미소를 짓고는 아까의 지민과 같이 먼 하늘을 올려다봤다.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 형은요. 왜 여기 있는 거에요?"
"나? 글쎄. 어쩌다보니."
"형한테 어쩌다보니가 어딨어."
"그런가."
"그렇죠."
"..그냥.. 있다고 치자."
"그게 뭐야."
토라진 말투에 쭉 빨아들이던 연기를 하늘로 후 불어낸 호석이 웃으며 지민을 쳐다봤다. 지긋이 바라보는 시선에 지민이 호석에게로 눈을 돌리면 그냥, 그렇다고 쳐. 하고 또 사람 좋게 허허 웃는 호석이 있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면서 아무 말이 없었다. 호석의 성격 상 어쩌다보니 라던가 대충이라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무언가의 목표가 정확히 있는 사람이었고, 그를 위해 온 힘을 다 하는 사람이었다. 지민은 가끔씩 호석을 힐끔거리며 치사해. 말 좀 해주지. 답답해. 등의 말을 속으로만 중얼중얼 말하고 있었지만 호석은 아무런 생각도 없는 듯 가끔씩 깜빡이는 눈과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는 손을 제외하면 거의 움직임이 없었다. 웃음 속에 감춰진, 무엇도 알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예전에도 그랬다.
*
"어떤 새끼인지 잡아내."
"예, 알겠습니다."
"못 잡아내면 다 뒤질 줄 알아."
"..예."
회사에 들어오자마자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평소 같았으면 몇몇 녀석들이 떠들고 있었을 로비에도, 가끔씩 싸움이 붙는 휴게실에도 단 한 명의 사람도 보이질 않았다. 다들 무언가 수군수군 조용히 속닥거리고 있고 저 안쪽의 회의실에서는 낮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불안한 예감에 발을 빠르게 움직였다. 나름대로 사무실의 구색은 갖추고 있어서 자신의 자리로 향한 호석이 소리를 낮춰 자신의 팀원들에게 물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의자에 앉으며 물으니 팀원 중 한 명이 다가와 속삭였다.
"글쎄, 이번 거래장소에 갔다가. 습격을 당했대요."
"습격?"
"장소에 갔는데, 글쎄 아무도 없었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래서 다 같이 들어가지 말고 한 명만 들어가자고 했대요. 그리고 딱 들어갔는데."
"어."
"거기에 경찰이 쫙 깔려서 몇 명이 잡혀들어갔다 이거죠."
"뭐?"
높아진 목소리에 팀원이 쉿, 쉿 거리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하는 얘기를 마저 들으려고 하는데 회의실에서 나온 사람들 중에 지민이 있었다. 지민이 왜? 절로 시선이 그리로 향했고 지민 역시 시선을 느꼈는지 호석을 바라봤다. 잠시 얽힌 시선은 금방 끊어졌다. 이 건은 큰 일인 것이 분명했다. 매일 다가와서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형님, 형님 거리던 놈이 저렇게나 날카로운 눈빛을 하다니. 이야기를 마저 들어보니 지민과 함께 들어온 신입들 중 몇 명이 미처 도망치지를 못하고 잡혀들어갔다는데 아까 보았던 지민의 표정에서는 슬픔이나 분노는 보이지 않고, 그저 고인 물처럼 차갑고 고요하기만 했다.
거래장소에 경찰이 깔렸다는 것은 거래하는 날짜, 장소, 물품 등의 정보가 경찰에 들어갔다는 것을 뜻했다. 이런 정보들은 신입들은 물론이요 호석과 비슷한 급의 사람들이어야 알 수 있을 만한 정보였다. 그런데 그 몇 안되는 사람들 중에서 배신자가 있다는 것이냐며 간부들이 부하들에게 계속해서 화를 냈다. 호석 아래의 녀석들도 다른 녀석들도 하나같이 눈치를 보며 다닐 뿐이었다. 안 그래도 예민해져있는 간부들을 건드려봐야 좋을 게 없다는 것이었다. 그 눈치보는 녀석들 사이에 지민은 들어있지 않았다. 말빨이 좋고 잔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게 거짓은 아니었던지 지민은 금방 간부 급으로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간부들에게 예쁨을 받고 있었고 그만큼 많이 불려다녔다.
"바쁘네."
"그러게요. 죽겠어요.."
"우리 꼬맹이 데리고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닌대."
"몰라요. 데려가놓고 나는 계속 차 안에 있으래."
"차 안에?"
"네."
이 녀석을 데리고 가는 거면 분명 어디서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알아내려고 그 쪽 조직이랑 경찰 말단 애들 조지는 걸텐데. 근데 대강 꼬투리를 잡았을 얘는 왜 안 데리고 가? 말빨이 좋아서 유도신문하고 정보 캐내는 데에 꽤나 쓸만할텐데.. 의문이 들었지만 그 의문은 지민의 말에 쨍그랑 전부 깨져버렸다. 아, 심문을 하자니까 자꾸 주먹부터 나가잖아요. 푸핫, 저도 모르게 터져버린 웃음에 미안하다며 얘기를 이어서 하라고 하니 지민이 금세 또 뾰로통해져있다.
"아니, 패봐야 뭘 불겠어. 안 그래요?"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하자고 했는데."
"묶어놓고, 협박이라도 하자고 그랬죠. 겁 먹게만 하고."
"그 인간들이 그걸로 끝낼 인간들이냐."
"그러게요. 내가 바보지."
내가 바보지. 그치이. 중얼거리던 지민이 자신을 찾아온 녀석에게 알겠어. 갈게. 하고 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님, 나 가요. 옆에 서서 내려다보는 것이 왠지 맘에 들지 않아 올려다보며 오이야. 한 마디 해주고는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렸다. 발소리가 들릴 때가 되었는데 아직도 옆에서 인기척이 나서 다시 쳐다보니 지민이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입만 슬쩍 웃어보이고는 방을 나갔다. 그 표정은 내가 지어야하는 거 아니냐. 호석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구겨진 웃음을 지었다.
*
협박하고, 고문하고, 괴롭히는 일은 자신과는 맞지 않았다. 여기저기 간부들에게 불려다니며 경찰과 연결되어있었지만 더 이상은 필요도 없을 뿐더러 조직원 본인이 경찰과의 딜을 끊어버린 그런 자들을 비밀스레 고발했다. 어찌 보면 이게 도대체 경찰이 하는 일인지 아니면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사람이 죽거나 고통을 받아도 아무 감정이 생기지 않는 소시오패스가 하는 짓인지 모를 일이었다. 점점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가며 피폐해져가는 정신을 조금씩 밝혀주는 것은 호석이었다.
조직원들의 눈을 피해 공원 벤치에서 담배를 꺼내 물자 새삼,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조직에 들어온 지 한 달 쯤 됐을 때였던가. 그때도 이 일에 회의감을 느꼈을 때였다. 지금이라도 그만 둘까. 그런 생각을 하며 라이터를 꺼내려는데 저쪽에서 누군가가 걸어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자신보다 훨씬 위의 간부, 호석이었다. 그에게 인사를 하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저도 모르게 불도 안 붙인 담배를 재떨이에 눌렀다.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하니 그가 웃으며 왜, 그냥 피지. 하고 옆자리에 앉았다.
"아닙니다."
"요즘 일은 좀 어때?"
"괜찮습니다."
"음, 힘들진 않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렇구나. 하고 그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같이 들어온 신입들이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며 잘 챙겨주기도 하고, 따끔하게 혼이 나고 돌아오면 이런 때에는 이렇게 해야한다 저럴 때에는 저렇게 해야한다 하며 다정한 충고를 해주기도 한다고 말해줬던 덕에 호석과 얘기를 얼마 해보지 않았음에도 크게 긴장은 하지 않았다. 담배를 꺼내 문 그의 모습에 뒤늦게 라이터를 꺼내려는데 이미 자신의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인 그를 보고 지민은 아. 하며 주머니에 다시 라이터를 집어넣었다.
"자."
"이걸 왜.."
갑작스레 자신에게 내밀어진 담배를 보고 중얼거리듯 물으니 호석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나 때문에 하나 날렸잖아. 하고는 다정하게 웃었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자 그가 끄덕하고는 무언가 생각할 것이 있는 듯 멀리 하늘을 바라보며 연신 담배만 뻑뻑 피웠다. 날카로우면서도 매끈하게 내려오는 그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지민이 홀리듯 그에게 말했다.
"형님."
"응?"
"형님은.. 왜 여기 계시는 겁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유를 생각하는 것인지 그는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 더 옆을 곁눈질로 바라보다 흐음. 하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말했다. 글쎄, 모르겠네. 왜일까? 느긋해보이는 그를 보고있자니 어이가 없기도 해서 이유가 없는 거냐고 물으니 호석은 응. 나도 몰라. 하며 또 싱긋 웃었다. 여기에 온 이유가 없을 리가 없었다. 잡혀왔다거나, 혹은 속아서 들어왔거나, 혹은 정말 본인이 원해서 들어왔다거나. 이유는 충분히 있을텐데.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린 채 호석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어느새 짧아진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고는 지민의 등을 툭툭 토닥이고서 자리를 떴다.
*
배신자에 대한 얘기가 진행되면서도 조직은 똑같이 돌아갔다. 돈을 빌려간 사람들의 집을 찾아가 깽판을 벌이고 돈을 뺏어오거나, 그 가족 중 누군가를 납치해온다거나. 또는 마약이나 금품 같은 것을 더 비싸게 사고 파는 일을 이어갔다. 거래를 할 때에는 지민이가 함께 갔고, 그 뒤에는 호석과 그 부하들이 지키고 서있었다. 지민이가 일을 하는 건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신입의 포지션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거래를 주도한다거나 하는 일은 맡기지 않았다. 그저, 후임으로 삼겠다며 간부새끼 하나가 그를 극진히도 아낄 뿐.
"내일도 예정 있어?"
"아뇨. 내일은 드디어 쉽니다."
"오, 축하해."
"혹시나 모르죠. 그래놓고 부를런지."
"설마. 얼른 들어가서 쉬어."
"네-"
여전히 피곤이 가득 쌓여있는 그의 얼굴에는 눈 밑에 거뭇한 것이 자리잡은 지 오래였고, 맨들맨들해서 예뻤던 그의 피부도 푸석푸석하게 일어나있었다. 꼬맹이가 힘든 건 보고싶지 않구만. 호석이 고기와 야채를 양손 가득 사들고는 지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지민의 목소리는 또 색달랐다. 평소에 듣던 높은 톤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혼자 있을 때에는 조금 더 차분해지는지 낮아진 목소리가 귀를 울려 듣기 좋았다. 지금부터 고기 사들고 갈 테니까 밥이나 해놓으라고 했더니 지민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한창 먹을 때지. 중얼거리니 지민은 형님도 저랑 몇 살 차이 안 나잖아요. 하며 투덜거렸다. 웃으며 통화를 끊고 호석은 그의 집으로 향했다.
집 안은 별 것이 없었다. 침대, TV, 노트북, 가스레인지, 냉장고. 정말 최소한의 구색만 갖추고 사는구나 싶었다. 가스레인지나 침대, 냉장고는 원래 이 집에 붙어있는 거라고 했고 TV는 본가에 있던 걸 갖고왔단다. 그래봐야 얼마나 본다고. 고기를 구워먹으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데 가족의 얘기는 전혀 하질 않았다. 이 조직에 들어오기 전에 무얼 했는지도. 어쩌면 두 사람 사이에서는 그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금기였던 건 아닐까. 지금 와서 생각해본다.
"아. 아이스크림 먹을래요?"
"배부른데."
"그럼 이따 먹어요."
침대에 기대어 가만히 TV를 보았다. 나란히,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는 재미있는지 아닌지도 모를 드라마를 켜두고 멍하니 보았다. 지민도 말이 없었고 호석도 말이 없었다. 그러다 지민이 먼저 일어나 아이스크림을 꺼내왔다. 라임 맛 아이스크림. 상큼하니 그와 어울린다고도 생각했다. 초록색의 아이스크림을 조금씩 베어물어 천천히 녹여먹는 그를 보다 그의 손을 잡아당겨 한 입을 베어물었다. 아이, 형님! 살짝 찌푸려진 표정에 웃음이 나왔지만 어깨 한 번 으쓱하고는 모른 체 했다.
그 때 왜인지, 긴장이 되고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다. 장난을 친답시고 다시 한 번 그의 손을 잡자 조금 더 숨이 가빠졌고 그의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무니 조금 진정이 되는 듯 했다. 그러다 또 숨이 가빠졌다. 뻔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는. 이걸 드러내면 그와의 신뢰고, 관계고 모든게 다 무너질 것도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용기가 났다. 왜인지 내일이 깜깜하게 보이지 않아 그냥, 용기를 냈다. 여전히 아이스크림을 들고있는 그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그의 목 뒤를 받치고, 그대로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했다.
"형님, 잠ㄲ.."
"응."
"..."
"해도 돼?"
가까이서 마주친 눈은 멀리서 보던 것 보다 더 맑았고, 예뻤다. 밝은 갈색이 물을 담아놓은 듯 깨끗해서 그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는데 지민이 눈을 감았다. 살며시 감은 눈을 보다 천천히, 입술을 맞댔다. 기울어진 두 얼굴이 움직여 서로의 코가 닿고, 입술이 닿고, 볼이 닿고, 턱이 닿았다. 조심스레 빨아들이는 호석의 입술과 그보다 더 조심스럽게 그를 따라가는 지민의 입술이 계속해서 서로를 원했다. 아이스크림이 열기에 녹아 손을 타고 손목으로 흘러내리는 걸 깨달았지만 두 사람 모두 그런 건 신경쓰지 않았다.
입술을 떼고 다시 제자리에 앉아 팔과 손을 닦던 지민이 말했다. 어느 마피아들은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키스를 한다면서요. 그러자 호석이 응. 하고 덤덤하게 답했다. 그리고 말을 덧붙였다. 그 뜻도 있고, 나는 그 뜻이 아니기도 하고. 그 순간 지민이 퍼뜩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지만 호석은 지민을 바라보지 않은 채 담배를 꺼냈다. 펴도 돼?
"필 거면 저도 줘요."
"하나 밖에 없어."
"..아이."
작게 투정을 부린 지민이 담배를 찾으러가는 동안 호석은 이미 불을 붙이고 깊게 연기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빈 손으로 돌아와 자리에 털썩 앉은 지민의 얼굴을 향해 후 하고 뱉었다. 아, 뭐하는 거에요. 손으로 휘휘 눈 앞을 저으며 호석을 쳐다본 지민은 호석의 묘한 눈빛에 고개를 돌려 TV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건 모르나보네. 지민이 네? 하며 호석을 보자 호석은 아니야. 하고 담배를 내려다봤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그가 지민의 입에 담배를 꽂아주자 지민이 얼른 담배를 꺼냈다.
"피던 거 아니에요?"
"키스도 해놓고."
"그거는!"
"그냥 펴. 더 없어."
"아이 진짜.."
"담배값으로 한 번만 더 하자."
"형님!"
"좋다고? 알았어."
투덜투덜 나의 말에 한 번씩 꼭 대꾸를 하면서도 싫다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 아니면 응. 하는 그 짧은 대답이 좋았다. 조직에 들어오기 전에는 그렇게도 어렵던 연애를 여기서 하게되는 건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옆에서 곤히 잠든 지민을 깨워 나는 갈테니 쉬라고 해주고 그의 집을 나왔다. 호석은 집에 돌아가면서도 자꾸만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
어제까지만 해도 배신자를 잡아오라며 으르렁 거리던 총무가 왜인지 여유로운 표정으로 회사에 나타났다. 처음 이 난리가 났던 그 날과 같은 불길한 예감이었다. 저 인간이 저런 표정을 지었다는 건 배신자의 꼬리를 잡았거나, 이미 배신자를 잡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욕이 절로 나왔다. 이렇게까지 빨리 진행하라고 한 적은 없는데. 왠지 싸하다 했더니 이런 거였나. 자리에서 일어난 호석이 아무도 오지도 보지도 않을 공원으로 가서 핸드폰을 꺼내들어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전화가 연결된 순간, 가까이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형님, 나 찾아요?"
"지민아."
"왜 그렇게 급하게 찾아요. 나 잡아갈거야?"
"뭐? 아니, 이럴 때가 아니야. 박지민 도망가."
"왜 도망가게 해요? 들키면 형 죽어요."
"빨리 가기나 해, 멍청아."
그를 다그쳐 억지로 보낸 뒤 전화를 걸어 상황을 확인했다. 현재 지민이를 잡으려고 애들을 풀어둔 상태고, 자신은 지민과 가까운 사이였으니 그냥 회사로 들어와서 대기하라고. 이 말이 정말 대기를 말하는 것인지 또는, 고문의 준비를 하는 것인지. 그와 가까운 사이였다 라는 걸 들킨 순간부터 이미 자신의 안전은 없다고 생각한 호석은 빠르게 차를 몰아 최대한 먼 곳으로 향했다.
네 시간, 다섯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한반도의 끝이었다. 바닷가 좋네. 들어온 지 몇 달이 지나도 경상도 사투리가 남아있던 지민이 생각났다. 그리고 깜깜해서 보이지 않는 미래도. 바다라. 끝을 맞기에는 좋은 곳 아닌가. 생각하던 호석이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뒤를 돌았다. 여기까지 따라온 녀석은 같은 급 간부 한 명에 그 부하 열 명 정도. 승합차 끌고왔냐. 말하고는 한숨을 쉰 호석은 시간 좀 끌어볼까. 하며 맨 앞에 있는 녀석의 팔을 잡아챘다.
*
어지러워 뒤지겠네. 의자의 등받이 뒤로 묶여있는 팔이 얼마나 오래되었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어깨는 뻐근했고, 허리는 끊어질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방 안을 둘러보니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이 벽에 금이 가있고, 망치니 톱이니 하는 것들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늘어져있었다. 아마도 고문실로 쓰던 폐공장의 지하실일 것이다. 한숨이나 쉬고 싶은데 그러면 또 이 새끼들이 찾아오겠지. 갑자기 머릿속에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박지민. 도망 잘 갔냐고 전화라도 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잘 가지 못한 모양이었다.
"형님들, 저는 모른다니까요?"
"아니, 제가 그럴리가 없잖습니까. 저 콩팥이고 심장이고 다 팔려나갈 뻔 했던 거 아시잖습니까."
"형님. 저 박지민입니다."
그런 말이 통할리가 없잖아. 그러고보니 방 안에는 지키고 있는 놈이 하나도 없었다. 이거 무슨 영화인가. 잡혀있는 공주님을 구해서 탈출해라. 뭐 그런거야? 여긴 스타트지점이고?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쯤되면 웃을 수 있는 것도 여기까지다. 이런 악당 나와줘야하는데. 그러지 않는 걸 보면 영화는 아닌 모양이었다. 소매 속에 숨겨두었던 작은 나이프를 꺼내 여러 번 슥슥 칼집을 내어 겨우 끊어냈다. 테이블타이로 묶어둔 건 참 잘했는데, 내 칼은 뺏었어야지. 칼에 베인 손목이 아팠지만 그런 건 나중에나 신경써야지 싶었다.
그 다음부터는 기억이 중간중간 끊겨있었다. 방에서 튀어나가서 지민이를 구하겠다고 그 방을 지키고 있던 놈들한테 달려들어서 하나하나 기절시키고, 생각과는 다른 루트였지만 칼로 발목의 인대를 끊어놓기도 했다. 지민이가 묶여있는 걸 다 풀고, 지하실에서 나가 풀숲으로 달려가면서도 뒤를 돌아봤을 때 지민은 왜 형이 나를 구해요? 하는 표정을 몇 번이고 지었다. 이 좆같은 경찰 새끼들은 언제 오는 거야 속으로 몇 번을 소리치며 지민이를 붙들고 뛰었지만 소속 경찰이 둘이나 죽어간다고 몇 시간 전에 연락을 했는데도 언제나 그렇듯 경찰이 온 건 한참 후였다.
"박지민. 정신 차려야 된다."
"형."
"너나 나나 여기서 나가야 돼. 그래야 보호받아, 멍청아."
"여러 번 상상했는데요. 그래도 힘드네요 이거."
"뭐 죽을 것 처럼 말을 해."
"아마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피부를 찢어버릴 듯 날카로운 소리가 풀숲을 갈랐다. 아프잖아. 작게 중얼거린 지민이 고개를 숙이자 호석이 지민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너 하나는 살릴거야. 지민이 고개를 들어 호석을 바라보자 호석은 지민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말했다. 너는 살아야 돼. 나도 살 건데, 너는 꼭 살아남아야 돼. 숨어있어. 금방 찾으러 갈게. 그리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호석의 손을 지민이 다급하게 잡았다. 잠깐만! 평소에는 투박하다고만 생각했던 그 손이 바람에 휩쓸려가는 비단처럼 스르륵, 빠져나갔다. 지민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저 멀리 뛰어간 호석을 붙잡으러 가기에는 이미 늦어있었다.
*
공원 벤치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힌 지민이 연기를 뱉어내며 벤치에 등을 기댔다. 먼 하늘을 바라보며 눈만 깜빡이다 또 담배를 한 모금 쭉 빨아들이고는 고개를 숙여 연기를 뱉었다. 이쯤되면 그가 다가와서 옆자리에 앉아야하는데. 이정도로 기다렸으면 한 번 쯤 나타나줘야 하는건데. 금방 온다고 해놓고는 지금까지도 오질 않았다. 치사해. 말 좀 해주지. 진작에 내가 내 얘기를 할 수 있게라도 해주지.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좀 해주고 가지. 눈에 차오르는 것이 자꾸만 시야를 방해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벤치에 완전히 기대었다.
"뭐하냐, 혼자."
익숙한 목소리였다. 몇 달이 지났어도 잊을 수가 없는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을 때, 그 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예 몸을 젖혀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거기서 보고 있으면 나를 보면서 당신도 울기나 하라고. 당신은 아무 걱정 없이 내 생각도 안하고 편하게 살고 있는 건 아니냐고. 눈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기분 나빠 몸을 똑바로 하고 앉아 손등으로 슥슥 닦았다. 뜨거움에 손을 보니 몇 번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이미 다 타들어간 담배가 보여 재떨이에 눌러 끄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 생각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으니까, 꿈에도 나타나지 마쇼."
중얼거리듯 하늘을 향해 말한 지민이 천천히 길을 따라 걸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들렸고, 개가 짖는 소리도 들렸고, 몇몇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도 들렸다. 주변을 둘러보던 지민이 어느새 땅을 보며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여러 갈래의 길에서도 계속해서 앞으로만 걸었다. 한참을 걷기만 했다. 그리고 천천히, 움츠러든 어깨가 잘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