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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단편

[국민] 우산


(BGM :: 어반자카파 - Let It Rain)




"다녀올게요-!"


급하게 나오느라 하늘이 어떤지 바깥에 비가 오는지 안 오는지도 모른 채 뛰어나왔는데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길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벌써부터 아주 약하게 빗방울이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오늘 비 안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어제의 일기예보를 생각하며 버스에 올라탔다. 


이어폰을 꽂고 회색 하늘때문인지 왠지 차분히 가라앉는 기분을 어떻게든 끌어올려보려 평소에도 자주 듣던 가수의 곡을 재생했다. 빠른 비트에 신나는 반주가 기분을 좋게 만들었고, 자는 사이에 또 무슨 일이 있었나 하며 인터넷뉴스를 보고있었다. 단톡방의 알림이 계속해서 상태바에 떠올랐지만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또 별 거 아닌 얘기들로 떠들고 있겠지.

어디쯤 왔을까, 하는 생각에 고개를 들자 뿌옇게 변한 창문 너머로 주르륵 쏟아지고 있는 비가 보였다. 이런, 큰일이다. 정류장에서 강의실 건물까지는 꽤나 멀었다. 어쩔 수 없나. 뛰어가야겠네.. 요즘 들어 따뜻해진 날씨에 아무 생각없이 겉옷도 입지 않은 나를 원망했다. 가방 한 켠에 분명 우산을 뒀던 것 같은데 뒤져봐도 우산은 나오질 않았다. 설마 과방 사물함에 넣어뒀나.


학교 앞 정류장에 도착한 버스는 앞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차를 피하려고 했는지 급하게 멈춰섰다.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내가 휘청이자 뒤에서 잡아주는 손길이 있었다. 아, 감사합니다. 하고 뒤를 돌아봤을 때 나를 보는 눈이 굉장히 낯익었다. 어?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자 형, 저 팔 아픈데.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급하게 자세를 바로잡고 서서 함께 버스에서 내렸다.


"너 지금 수업이야?"
"네, 전공이요. 김 교수님 거."
"와.. 여전히 오전 수업에 넣으시는구나. 졸리겠다."
"그러게요.. 큰일이에요. 아, 근데. 형 우산 없어요?"
"아, 응. 가방에 있는 줄 알았더니 없더라구."


저 두 갠데, 하나 빌려드릴까요? 한쪽 손으로는 우산을 든 채로 다른 한쪽 손으로 조금은 급하게 가방을 열려고 하는 정국이의 손을 잡으면서 아니야. 금방 그치겠지! 하고 말하는데 손이 많이 차가웠다. 비가 와서 그런가. 잠시 손을 뗐다가 우산을 잡은 손이 유난히 빨개보여 그의 손 위로 손을 겹쳐잡았다. 아까까지 주머니에 넣어뒀던 덕인지 따뜻한 내 손이 그의 손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아, 그, 형이 들려구요?"
"응? 어, 그래!"
"네. 아... 형 강의실 어디에요?"
"4층! 나도 전공이니까 건물은 같아."
"그럼 같이 쓰고 가면 되겠네요."


남자끼리 손을 겹쳐잡는다는 게, 조금 그렇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스르르 내려가는 그의 손이 눈에 계속 걸렸다. 아예 겉옷 주머니에 손을 넣은 정국이 말을 걸어와 자연스레 얘기를 이어나갔다. 멀게만 느껴졌던 건물은 오늘따라 가까워, 별로 얘기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도착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따가는 그치면 좋겠네요. 하는 말에 그러게. 얼른 그쳐라- 하고 대답하고는 고맙다며 정국이의 머리를 쓰다듬자 그는 어색한지 뒷머리를 벅벅 긁고는 나중에 봬요- 하고 인사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 가야하는 강의실로 향했다.


"아직도 오네-..."


한숨이 섞인 내 목소리는 나 스스로가 들어도 힘이 없어보였다. 집에 가야하는데, 어떡하지. 형형색색의 우산들을 펼쳐들고 정류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하다 에이 모르겠다. 하는 생각으로 뛰었다. 차가운 빗줄기가 머리와 옷을 조금씩 적시고 있었다. 의외로 빗줄기가 굵지는 않아 많이 젖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축축한 느낌은 기분을 나쁘게 했다. 아무래도 오늘 감기걸리겠네...


"형!"
"어? 너 왜 여기있어?"
"저 운전학원 가느라구요."
"아- 맞다 운전배운댔지."
"아니 근데, 왜 비를 맞고 다니고 그래요."


자연스레 제 손에 있던 장우산을 내게 건네는 정국이의 표정이 뿌듯해보여 나도 모르게 우산을 받아들고는 바보 같은 목소리로 어...? 하고 우산을 한 번 보고 정국이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는 예비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건지 가방에서 접이식 우산을 꺼내더니 나에게 보여주면서 저 하나 더 있댔잖아요. 하고 기분 좋게 웃었다. 내가 뭐랬어- 하는 듯한 말투에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웃어버렸다.


"내가 운이 좋았네. 그치."
"그러네요, 저 만난 게 천만다행이죠."
"고마워."
"뭘요. 아, 버스 왔어요. 형 저거 타야되죠."
"응응! 저거 맞아. 우산은 내일 줄게!"
"알았어요. 잘가요, 내일 봐요-"


그와 인사하고 의자에 앉아 가만히 있자니 주인을 닮아 튼튼해보이는 검은색 장우산이 눈에 들어왔다. 적갈색의 손잡이 아랫쪽 평평한 곳에 JK라고 검은색 매직으로 쓰여있는 걸 보자마자 괜시리 웃음이 나와 소리를 숨기고 베시시 웃었다. 두 뺨에서 시작된 따스한 온기가 온 얼굴로 퍼지는 듯 했다.


*


어쩌다보니 형한테 우산을 빌려주기는 했는데, 이걸로 한 번 더 만날 수 있는 건 좋은데, 수업을 듣는데도 자꾸 지민의 생각만 나서 수업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가 않았다. 계속 멍하니 교재만 보고 있으니 옆에 앉은 동기가 조용히 교재의 페이지를 넘겨 줄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우산도 줄 겸 밥이나 같이 먹자는 지민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자취생인 걸 말해주는 게 아니었어. 이렇게 갑작스레 약속을 잡으니 형과 무슨 얘기를 해야할 지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하아..."
"뭔데. 너 왜 그러는데."
"아냐."
"하, 새끼. 답답하게 구네."


한참을 멍하니 있고 한숨까지 쉬는 주제에 자기한테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내가 얄미웠는지 동기는 또 다시 생각에 잠기는 나를 두고 수업에 집중했다. 아무 말이나 해볼까, 저녁 먹고나서 술도 마시자고 해볼까, 내가 형한테 그렇게 친한 동생도 아닐텐데 그건 좀 그런가. 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쉬는 시간이 되고, 지겨운 수업시간이 언제 갈까 생각하며 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갑작스레 진동이 울렸다. 형이었다. 무슨 일이지. 오늘 약속 취소한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여보세요?"
'여보세요? 정국아, 우산 있어?'
"네? 있, 아, 없어요."
'없어? 수업 언제 끝나? 데리러갈까?'
"어... 저 한 시간만 있으면 끝나요."
'그래? 그럼 끝나구 거기서 기다려. 내가 갈게!'
"네 알겠어요."
'응 이따봐-'


어제 쓰고 잘 닦아서 가방 속에 넣어둔 접이식 우산을 생각하면서 속으로 우산에게 미안하다. 너보다 형이 오는 게 더 중요하다. 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오늘 만나는 걸 계기로 형이랑 더 자주 만나고 더 많이 얘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이에 쉬는 시간이 끝나버렸다.

수업이 끝나고 건물의 정문에서 빗줄기가 떨어지는 걸 지켜보면서 형이 온제 올까 기다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 두툼한 검은 후드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는 비니에 뿔테안경까지 쓰고 잔걸음으로 뛰어오는 형의 모습이 보였다. 저렇게 있으면 나보다도 어려보인단 말이지. 형을 보면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자 형이 내 앞에 오자마자 뭐라구 했어? 하고 묻는다. 암말 안했어요. 하고 형이 들고있는 우산 속으로 들어가 우산을 들고있는 그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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