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Soap Opera
라이언 @ryan_jun
다들 어디야
ㅡ
불고기 @bulgogi_jin
나 3번 출구! 준아 나 데리러 와
출구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가며 밖을 내다보니 데리러 오라는 말 한 마디에 마중나온 남준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확 바뀐회색의 머리가 낯선 느낌을 주었지만, 출구 옆에 가만히 서서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입을 살짝 벌린 채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모습이 딱 남준이었다. 계단을 거의 다 올라오니 턱까지 숨이 차올랐다. 나날이 나빠지는 체력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밖으로 발을 내딛자 남준이 휙 뒤를 돌아봤다. 아, 놀래키려고 했는데.
"왔어요?"
"응. 가자-"
"왜 이렇게 급해요. 천천히 가요."
"애들 기다리잖아."
"괜찮아요. 밥은 먹고 왔어요?"
"아니- 늦잠 잤어."
다른 사람들이 기다린다는 것은 사실이자 거짓이었다. 다들 이미 노래방에 가서 내 생각은 않고 신나게 놀고 있을 테고, 딱히 준이와 내가 30분 정도 늦게 간다고 해서 신경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배는 고픈데 어쩌지 하고 생각하는데 준이가 손을 잡아끌었다. 어어? 아직 잠이 덜 깬 것도 있고 허기가 지는 것도 있고 해서 힘 없이 끌려가자 길거리 분식집 앞에 우두커니 서게 되었다.
"형 떡볶이 좋아하죠."
"어? 어."
"먹고 싶댔잖아요."
"아, 트윗!"
"튀김은 잘 안 먹죠. 순대는요?"
"순대 좋아해!"
트위터에서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다 보는 사이이다보니, 버릇이나 취향같은 것들도 구석구석 알게 됐다. 남준이는 해산물을 못 먹는다. 다 못 먹는 것도 아니고 어떤 건 먹는단다. 그리고 이어폰 같은 걸 잘 잃어버린다. 툭하면 이어폰 새로 샀다는 트윗이 올라온다. 그럴 때마다 남준이를 놀리는 건 나와 지인들의 몫이다. 가끔씩은 카페에서 자리를 옮기려고 잃어날 때, 남준아 핸드폰은? 하고 물어본다. 그러면 남준이는 어. 하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꼭 지인 중에 한 명이 들고있다. 두고 갈까봐 챙긴 거거나 놀려먹으려고 챙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나와 지인들이 챙기는 만큼 준이도 우리를 챙겨준다. 오랜만에 만나면 오랜만에 만나는 대로 만난 직후에는 조금 거리를 뒀다가 다가와 주고, 자주 보면 자주 보는 대로 가까이서 나를 챙겨주곤 한다. 바로 지금처럼. 다같이 모이기로 했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지도를 봐도 잘 모를 때에는 꼭 준이가 데리러 와줬다. 언제부턴가 으레 그래왔고,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의아함을 가지지 않았다. 가끔씩은 뭘 먹다가 흘렸을 때 준이가 휴지를 가져와서 닦아주기도 했는데, 그걸 보고 지인이 준이에게 왜 그렇게 열심히 챙겨주냐고 묻자 준이는 그런 질문을 받을 줄 몰랐던 건지 어깨를 으쓱하며 제가 자주 그래서 그런가봐요. 라고 대답했었다.
"아, 시간 너무 지났다. 얼른 가자."
"이제 배가 좀 찼어요?"
"응."
배도 부르고 기분이 좋아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웃고 났더니 준이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이건 좀 아니었나? 민망함에 어서 가자며 남준이를 재촉했다. 노래방에 도착하니 아니나다를까 나를 반겨주기는 했지만 다들 노래 부르고 노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휴, 이 사람들 안되겠네. 비어있는 자리가 구석자리여서 자연스레 준이와 나란히 앉아 노래방 책을 봤다. 솔직히 노래는 잘 모르겠고, 책을 넘기는 준이 손이 참 예쁜 건 알겠다.
"형 이 노래 알죠."
"어?"
"이거."
"어, 알어."
"같이 불러요."
"그래!"
글자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길쭉하고 예뻐서 나도 모르게 멍하니 따라가고만 있다가 또 어리버리 대답을 했다. 심지어는 고개를 틀어 나와 눈을 맞추며 말하는 준이 때문에 자꾸만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떻게든 말하는 게 귀에 들어오긴 했어서 신기할 지경이었다. 왜 이렇게 두근거리는지는 진작에 알았다. 준이에 대한 마음을 여러 번 곱씹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었다. 온라인에서 알게 되었다고는 해도, 준이는 굉장히 가깝고 친한 동생이었고 예전부터 아무 감정없이 그를 가까이에 두고 지내왔다.
그런 그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뭐였지.
곰곰히 생각해봤었다. 생각이 많아진다는 새벽 시간, 침대에 대자로 누워서 천장을 바라봤다. 준이를 좋아한다고? 내가? 여러 번 내 마음에게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네 였다. 왜일까. 어쩌다가? 그에게 빠지게 된 이유를 끄집어내다 결국은 발견해버렸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었고, 내가 잘하는 것이 있냐고 물으면 거기에 대답하지 못할 정도의 자존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남준이는 달랐다. 무엇을 잘하냐 물으면 이러이러한 것들을 잘한다 말할 자신감이 있었고,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느낄 지언정 절대 본인이 못났고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형은 좀 더 남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단 둘이 술을 마시면서 내게 했던 말이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혼자서 끙끙 앓고 속이 곪아가는 모습을 본 준이가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은 날카로운 단검처럼 심장을 아프게 찔러왔고, 상처가 점점 벌어지는 것 마냥 끊임없이 쓰리고 아팠다. 말을 듣고서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자 준이는 비어버린 내 잔에 다시 술을 채워주면서 털어놓을 곳이 없어서 혼자 안고 있는 거면, 나한테라도 다 버려요. 라고 말했었다. 젠장할. 이 사람은 도대체가 멋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다 못해 고민하고 생각에 빠진 모습조차도 멋있으니 말 다했지.
심지어는 그런 사람이 성격도 좋고 생각도 좋았다. 모난 곳이 없이 둥글둥글해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가끔씩 삐질 때가 있기는 했지만 그럴 때마다 미안하다는 말에 사르르 풀려버리는 것을 보면 절대 나쁜 성격은 아니었다. 거기다가 지인들과 장난을 칠 때에도 자신은 의도하지 않은 것 같지만 정말 귀여운 표정을 지을 때가 있다. 부끄러우면 보조개가 쏙 들어가게 베시시 웃을 때도 있고, 가끔은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찡긋하고 윙크를 발사할 때도 있다. 그러고나서 민망했는지 그 큰 두 손으로 얼굴을 폭 가려버리는 것이 사실 제일 귀엽다.
*
어느 날 지인 중의 한 명이 나에게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석진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나보다. 솔직히 조금은 눈치를 채고 있었던 탓에 저도 그렇게 느꼈다며 맞장구를 쳤다. 그 다음은 시시콜콜한 얘기들이 이어졌고, 이야기는 금방 끝이 났다. 사실 속으로는 석진이 형이 누굴 좋아하든 간에 내가 그 사람보다 훨씬 잘해줄 자신이 있었다. 형이 당황스럽거나 부담스러워할까봐 부러 티를 내지 않는 것 뿐이지, 내가 석진이 형을 정말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그런 형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타임라인에는 가끔씩 짝사랑이나 사랑에 힘들어하는 내용의 트윗이 올라오곤 했고, 석진이 형을 직접 볼 때에도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였었다. 근심이 가득한 얼굴 위에 먹구름까지 껴있는 것 마냥 어둡고 슬펐던 탓에, 직접 형에게 물어보려다 그냥 얌전히 모르는 척을 했다. 지금 나는 짝사랑에 대한 노래에 꽂혀있다는 듯이 노래를 선곡해서 올리기도 했고, 슬픈 영화를 보고 트윗하기도 했다. 그러다 그럴 때마다 타임라인에서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형을 보고서 그 짓도 그만뒀다.
"형, 뭐 털어놓고 싶은 말 없어요?"
내 물음에 형은 느리게 고개를 저으며 없다고 했다. 형과 내가 같이 알고 있는 지인들은 하나같이 숨겨진 계정을 보고 알았다는데 거기에 나는 없었다. 그걸 깨닫고서 나는 아직 형에게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닌가 수도 없이 생각했다. 몇 년 간 알고 지냈는데, 나보다도 더 짧게 알고 지낸 사람들도 거기에 있는데, 나는 아직도 그 정도도 안된다는 걸까. 그리고 지금 다시 한 번 형에게 거절당했다. 나도 모르게 어떤 감정이 올라와서 그 감정을 내뱉듯 형에게 말을 툭, 뱉었다.
"나를 좀 믿어봐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형의 눈빛이 묘하게 흔들리고 있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했었더라 하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나는 그저 나를 믿으라는 말 밖에 하지 않았는데. 말투가 문제였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형이 고개를 숙이며 푸스스 웃었다. 왜지. 방금 분명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갑자기 뭐가 웃긴 거지. 조용해진 우리 사이에 작은 목소리가 퍼졌다. 아니야. 아니야아... 그거... 아니야... 믿지 않겠다는 뜻일까. 시간이 갈 수록 생각이 점점 머릿속을 지배하는 느낌이 들어 형에게 이제 그만 일어나자고 하고 형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
친한 사람들과 모여있는 자리에서 누군가의 연애얘기를 하다보니 자연스레 솔로인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춰졌다. 얘기를 리드해나가는 형의 바로 옆에 앉은 게 나였기에 자연스레 나부터 타겟이 되었다. 아직 애인은 없다고 했더니 좋아하는 사람은 있냐고 묻기에 있다고 했다. 그 순간 바뀌는 석진 형의 표정이 얼핏 눈에 들어왔지만 아니겠지 싶어 그냥 넘어갔다. 그 다음은 석진 형이었다. 몇몇 사람이 너 좋아하는 사람 있잖아 라고 몰아가는 통에 석진 형이 아이 진짜! 하고 소리치더니 그래 있다! 하고 말을 하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모를 행동을 했다.
그리고 그 날 밤, 메세지가 왔다.
혹시 이번 주 금요일에 시간 되냐는 메세지. 금요일이면 분명 이 형이 술을 마시자는 거구나 싶기도 했고, 여러모로 들은 얘기도 많았기 때문에 나는 괜찮다고 했다. 무슨 얘기든 만나서 형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 약속 시간을 정하고, 장소를 정하고, 형에게 잘 자라고 인사를 해주고 나서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 기 빨려. 이게 기 빨린다는 거구나. 무거워진 눈꺼풀을 내려 눈을 감고서 생각했다. 형이 좋아하는 사람이 나보다 훨씬 잘난 사람이면 어쩌지, 내가 형을 좋아하는 것보다 형이 그 사람을 더 좋아하는 거면 어쩌지. 한참동안 걱정만 하다 잠이 들었다.
"준아!"
"어, 먼저 와있었네요."
"그럼-! 내가 얼마나 약속을 잘 지키는데."
"맨날 늦잠 주무시는 분이?"
"아이, 진짜."
"들어가요."
나란히 술집으로 들어가 칸막이가 되어있는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술을 마시는 게 주 목적은 아니었던지라 조금만 시키고 안주거리로 대충 찌개를 주문했다. 한 잔, 두 잔. 말도 없이 잔이 기울어지고 채워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형의 표정이 자꾸만 어두워져 갔다. 덩달아 내 표정도 점점 굳어가는 것이 거울로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먼저 물어보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형이 입을 떼기만 기다리다 어느 새 소주 한 병을 다 비우고 새 병을 뜯었다. 취기가 조금씩 올라올 즈음, 형이 입을 떼었다. 남준아. 형의 입에서 애칭이 아닌 이름이 나온 것은 실로 오랜만이라 네. 하고 대답했더니 다음 말이 천천히 이어졌다.
"내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뭔데요?"
"무례한 질문이라는 거 아는데, 혹시.. 그,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른.. 많은 사람들이랑, 사귀는 과정 같은 게.. 다른가?"
형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나는 지하로 땅굴로 저 아래로 파고들어가는 나의 정신을 잡아끌어내야만 했다. 형의 말투에서 이미, 동성애자와 자신을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고 거기다 안지가 몇 년 짼데 이제와서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더 깊은 상처였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궁금해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질문에 나는 제대로 대답해주고 싶은 마음이 요만큼도 없었다. 쪼잔하게 보이고 찌질하게 보일 지 몰라도 나는 그랬다. 내가 많이 나간건지는 몰라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를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왜 갑자기 묻는 거에요?"
"아니, 그. 오해하지 말고.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다를 게 뭐가 있어요, 어차피 사람이 사람 좋아서 사귀자고 하고 그러는 건데."
"..준아."
"왜요."
"화내지 마."
그제야 내가 형한테 화를 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무리 그래도 말을 돌릴지언정 형한테 화를 내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고개를 저으며 미안하다고 하자 형은 끄덕이며 내가 미안해. 하고 말했다. 각자 잔을 들고 짠, 잔이 부딪혔다. 말없이 소주 한 잔을 한 번에 마셨다. 잔을 내려놓았지만, 형을 볼 수가 없어서 차분해지려고 노력하는데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게 아니고.. 나는 모르니까. 어떤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민폐끼칠 수는 없는 거잖아."
"..그러면.."
"응.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남자야. 그래서.. 그 사람은 완전히 게이여서. 몰라서 물어본 거였어."
"..그렇구나."
"미안해, 이상한 질문 해서."
술자리는 금방 끝났다. 형도 나도 그 이후로 정말 퍼마신다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로 술을 연거푸 마셨다. 형은 아마도 그 좋아하는 사람때문에 힘든 것일테고, 나도 내가 좋아하고 있는 사람, 눈 앞에 있는 형 때문에 힘든 것이었다. 사랑이라는 게 이렇게도 마음대로 되질 않고 그런 것이었다. 이와중에도 형이 아파하고 힘들어하지 않도록 그 사람과 잘되길 바라는 내가 보여서 멍청하고 바보같은 나 스스로에게 혐오감이 들 정도였다.
*
점점 준이와 만나는 날이 줄어들었다. 예전처럼 같이 영화를 보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쇼핑하거나 그냥 놀러다니는 것도 줄었다. 이건 다 내 탓이고 내가 멀리하는 거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프고 갑갑한 것은 그대로였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준이를 볼 때마다 내가 널 좋아해. 이 말을 하고 싶어져서 부러 다같이 있을 때에도 저 멀리 떨어져서 앉고, 둘만 만나는 일은 없도록 하고, 일부러 약속이나 일을 만들어서 바쁜 척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널 좋아하는 건 변하질 않았다.
정말 몇 주동안 준이를 못보게 되니 이러다 상사병으로 죽겠다 싶어 단단하게 각오를 하고 다같이 만나는 자리에 나갔다. 점심 전에 만나서 다같이 점심을 대충 먹고, 놀고, 저녁으로 고깃집에 간 것까지는 괜찮았다. 계속 준이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굳이 닿을 일을 만들지 않아서 조금이라도 덜 신경쓰이게 했다. 그래서 괜찮았는데, 바빠서 못봤다는 이유로 지인들이 자꾸만 술을 주는 바람에 어느새 시야가 흐려질 정도로 취해버렸다. 이러면 집에 가기도 힘든데..
"내가 형 데려다주고 갈게."
"괜찮겠어? 너 집 반대편 아니냐?"
"괜찮아. 아는 형한테 재워달라고 하지 뭐."
"그래 그럼. 들어가!"
어느샌가 이미 상황은 정리가 되어버렸고, 내 동의는 없이 이미 나는 준이와 함께 돌아가는 걸로 되어있었다. 가게 밖으로 나오니 찬바람에 조금씩 술이 깨는 것도 같아서 시야가 말짱해질 때부터는 내 어깨를 감싸고 있던 준이의 손을 밀어냈다. 내가 지금 누구때문에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땅굴 파고 난리를 치는 거네 싶어 한숨을 쉬었다.
"형, 왜 그렇게 많이 마셨어요."
"..애들이 줬잖아.."
"그렇다고 다 마셔요?"
"그럼 안 마셔?"
또 다시 정적. 터벅터벅 걸어가는 준이와 내 발소리가 어두운 골목에 퍼졌다. 열두시가 넘어가는 시간이라서 그런지 지하철 역 근처에 가도 사람이 없었다. 이제 마지막차도 다 떠났으려나. 택시를 타야하나 생각하는데 준이가 그랬다. 우리 조금만 더 걸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일까, 준이가 하는 말은 다 맞는 것 같아서 거기에 뭐라고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예전부터 그랬다. 누가 누굴 좋아하든, 어떻게 왜 좋아하든, 그건 그 사람의 마음에 달린 거라고 남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했을 때부터였던가.
한참을 걷다가 조금 다리가 아픈 것도 같아서 준아, 하고 부르고 벤치에 앉았다. 말 없이 다가와서 옆에 앉아주는 준이를 보고 새삼 또 다시 참 착한 사람이다, 생각했다.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준아. 하고 또 불렀는데, 준이는 응?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참 강하게도 느껴져서 준이를 바라보니 준이가 지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있었다.
"아, 내가 왜 불렀더라.."
"..뭐에요."
"기억났다."
"응?"
"너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 안 궁금해?"
"..글쎄요. 별로.. 안 궁금해요."
"정말로?"
"형이 말을 해주고 싶었으면 이미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을까요."
"..그것도 맞는 말이네."
다시 바라본 하늘에는 드물게 별이 보였다. 어제 비가 왔다가 개어서 그런 걸까. 어두컴컴한 하늘에 약하게 빛나는 별을 보고 있자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나도 준이한테는 저렇게 작은 존재일까, 나는 왜 이렇게 못난 걸까, 나는 왜.. 준이 옆에만 있으면 자꾸만 나 스스로를 더 까내리고 더 미워하고, 그러다보면 내가 더 싫고. 이제 이런 거 그만해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길었던 짝사랑도 끝내야겠다 싶었다.
"있잖아 남준아."
"..네."
"나 지금 술 다 깼거든?"
"..응."
준이와 눈을 마주쳤다.
"나 너 똑바로 보고 있는 거 보이지."
"응."
"내가 지금 하는 말은 다 진짜인거야. 술김에 이런 거 아니야."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래요."
"내가, 준아."
"..."
"내가 좋아하는 사람, 너야."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그대로, 준이의 표정이 굳었다가 확 어두워졌다. 그것도 그럴만한 게, 당장 몇 주 전에 나는 준이한테 상담을 했었고, 그 이후로 준이를 피해다녔고, 당장 오늘만 해도 나는 해산할 떼까지 준이와 얘기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이게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태도인가 싶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 형이랑은 연애같은 거 생각도 안해봤고 연애하고 싶지 않다 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
"굳이 대답해주지 않아도 돼. 나도 되게 뜬금없다는 거 알고 있고, 어렵다는 거 알고 있어."
"형."
"내가 고백했으니 꼭 사귀어야한다 그런 거 아니고, 니가 앞으로 불편할 것 같으면 내가 사라져도 되고."
"형."
"하하, 되게 어이없지. 얼마 전에 너한테 상담까지 해놓구, 그게 너래. 그치."
"말 좀 들어요."
내가 말을 해놓고도 지금 이 상황을 이 분위기를 부정하고 싶어서 되도 않는 말을 마구 늘어놓자 너는 내 말을 끊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렇게 화를 내듯이 내 말을 끊은 걸까. 아, 어떡하지 무서워. 그냥 도망갈까. 잠수타면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나는 왜 지금 말을 꺼냈지. 왜 짝사랑 그만한다고 했지. 나는 왜..
"안 사라져도 돼요. 그리고 어이없지 않아요."
"..."
"나도 형처럼 계속 말할 테니까 들어요. 나는, 형이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그 때 상담한 이후로 내가 싫어져서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은데 형 성격에 확 끊어낼 수는 없어서 그냥 이어나가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
"근데.. 그게, 정반대의 의미였다는 거네요? 그러면."
"준아."
"나 부정적인 말 하려는 거 아니니까 떨지 말아요."
멈칫. 자꾸 바르르 떨리던 손을 다른 손으로 꼭 잡았다. 이 상황이 무섭다고 생각했더니 손이 떨리고 있었나보다. 그리고 내 두 손을 준이가 꼭 감쌌다. 따스하게 퍼지는 온기에 준이를 쳐다보니, 준이는 나를 보지 않은 채 무슨 말을 해야할지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곰곰이 생각하는 눈빛, 표정. 말을 골랐는지 준이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말을 꺼냈다.
"있잖아요, 형."
"응."
"아마, 내가 더 먼저 좋아했을 거에요."
"응?"
"..내가, 형을, 더 먼저.. 좋아했을 거라구요."
그 말을 이해하는 데에 정확히 3초가 걸렸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니가 나를 더 먼저 좋아했을거라구?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나 생각하는데, 준이가 내 손을 잡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워요. 얼른 들어가요 우리. 몇 년 간 봐왔던 덕분에 차분한 척하려는 표정이 너무나도 잘 보여서 나는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다고 결론지었다. 그래도 사실 믿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잡고 있는 손이 믿을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 준이의 손을 다시 잡았다.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기분 좋았다. 그러자 준이가 먼저, 손을 살짝 풀더니 깍지를 껴서 다시 잡았다.
"..나 이거, 어떻게 받아들여야 돼?"
"..형이 이해한 그대로요."
"나 짝사랑 그만해도 돼?"
"..네. 형도, 나도 둘다요."
그 이후에 굳이 트위터나 지인들과의 단톡방에 나 얘랑 사귄다! 라고 소문을 내고 다니지는 않았다. 그저 트위터에는 둘이 같이 놀러간 사진, 먹은 음식 사진, 여행가서 찍은 사진 같은 것들이 더 자주 올라왔을 뿐이었고, 나중에 들어보니 지인들은 내 비밀 계정에 더이상 슬픈 트윗이 올라오지 않는 것과, 준이가 사랑 노래와 로맨스 영화들을 트윗하는 것을 보고서 둘이 잘됐구나 하고 짐작했다고 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준이인지는 알았냐고 했더니 진작에 알았다는 사람이 더러 있어서 새삼 그들의 관찰력에 놀라기도 했다.
달그락 달그락. 그때의 처량하고도 애절했던 우리와는 다르게 여유있고 편안한 표정으로 스테이크를 참 맛있게도 먹고 있는 준이를 눈 앞에서 보고 있자니 이 풍경이, 지금 이 순간이 진짜인가 꿈인가 싶어서 나는 준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응? 하고 쳐다보는 준이의 표정이 정말 순수한 아이같은 표정이어서 너는 참 표정이 다양하다. 라고 했더니 준이가 빙긋 웃었다. 바보같아- 했더니 또 살짝 째려보는 것이, 어쩜 사람이 저렇게 귀엽지 싶었다. 나도 참 답이 없네.
"어, 해진다."
"와.. 진짜 이쁘네요."
야외테라스에서 밥을 먹고 있던 터라 노을이 참 잘 보였다. 하와이의 노을은 이렇구나, 생각하다 노을이 너무 예뻐서 찍어올렸더니 지인들이 하나같이 신혼여행갔냐?! 라는 반응을 해서 준이와 보면서 웃기도 하고 달콤한 와인을 서로의 눈을 보면서 마시기도 했다. 바쁜 일상 안에서 시간을 내서 이렇게 여행을 왔다는 것도 좋았지만, 함께 온 사람이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어서 더 좋았다. 사랑해. 뜬금없는 나의 말에도 준이는 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나도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