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시간 째 똑같은 화면을 계속해서 들여보고 있자니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라는 흔한 드립마저 머릿속에 떠오르고 누군가가 쓱쓱 지우개로 지우는 것 마냥 하얗게 변하는 것이, 아렇게 아무리 앉아있어봐야 좋은 것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로 향했다. 씻고 옷갈아입고 나가자.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일 할 기분이 아니다.
"하아..."
간단하게 흰 티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아직은 쌀쌀한 바람이 부는 통에 감기에 걸릴까 검은 가디건도 걸쳤다. 이것저것 먹을 걸 잔뜩 살까도 싶었지만 오늘은 왠지 최소한의 것만 가지고 다니고 싶어 꼭 필요한 것들만 가방에 대충 쑤셔넣고 브리또와 음료수를 사서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평일인데다 아침도 낮도 아닌 애매한 시간이 그런지 나뭇잎들이 서로 스치는 소리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공원을 조금 걷다보니 예전부터 자주 앉아 가사를 생각하곤 하던 두개의 벤치가 나란히 놓여있는 공간이 나왔다. 벤치의 앞쪽으로는 분수가 있으면 딱 좋을 만한 동그란 공간이 있고, 벤치의 양 옆쪽으로 길이 나 있는 곳이었다. 길가에 나무가 빼곡하게 늘어서있어 탁 트인 느낌보다는 나만의 공간이라는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벤치에 앉아 노트와 펜을 꺼내놓고 뻑뻑한 눈을 돌려 나무들과 파란 하늘을 둘러보며 선선한 바람을 가만히 맞고있자니 무언가가 씻겨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으으- 찌뿌둥해."
한껏 기지개를 펴고는 사 온 브리또를 한 입 베어물며 노트를 가만히 내려보다가 매콤한 맛에 고개를 들고 음료수를 마시는데 저 멀리서 길쭉한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무언가가 잔뜩 들어있는 편의점 봉지를 들고 무거워보이는 백팩을 메고 걸어오는 그의 모습에 편의점 봉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그저 모델같다. 라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진짜 모델인가..? 평소에도 사람이 많은 곳에서 사람들의 행동이나 옷 스타일을 구경하는 건 재밌어했고, 가끔씩 이렇게 내 눈을 확 끄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 사람은 유난히 눈을 떼기 힘들었다.
내가 앉은 벤치가 아닌 옆 벤치에 앉아 봉지에 들어있던 삼각김밥 세 개를 꺼내놓은 남자는 작아보이는 입으로 야무지게도 오물오물, 한번에 세개를 연달아 먹으면서 봉지 속에 있던 음료수를 꺼냈다. 음료수 옆에서 아직도 무언가 바스락 소리가 나는 걸 보면 먹을 게 아직도 남아있는 듯 했다. 아무리 힐끔힐끔 조심스레 보고있다고는 해도 내 시선이 신경쓰이지도 않는지 남자는 세개 째의 마지막 한 입거리를 입에 쏙 넣고는 손을 탁탁 털었다. 키가 커서 그런가. 손도 크다. 나도 모르게 내 손을 한 번 보고 그의 손을 한 번 더 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한 입을 베어물고는 그대로 손에 들고있던 브리또를 발견했다. 정신이 없네, 정신이.
우물우물거리며 마저 먹고있자니 두툼한 책을 펴서 조용히 읽는 그의 옆모습이 연예인이나 모델을 보는 것만 같았다. 글씨가 빼곡히 차있는 책에 샤프로 무언가를 쓰고 지우고, 소리 없이 읽어보고, 표정을 바꾸면서 집중하는 모습이 멋있어 한참을 바라보다 머릿속에서 사진으로 찍어두고 싶은데, 안되겠지. 처음 본 사인데. 말을 걸어볼까? 이상하게 보려나? 어떤 사람일까? 온갖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혀갔다. 이런 감정에는 익숙하지 않다. 고개를 푹 숙이고 답지 않은 고민을 하다 답답함에 그냥 말을 걸어?! 하고 바라본 그는 내 쪽을 보고있었다.
"..저어,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 그, 잘생김이. 묻었네요."
"하하, 이 분 드립 좋아하시나보네."
예쁜 눈으로 올곧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나도 모르게 허둥지둥 손을 휘휘 저으며 대답하니 어른들 특유의 여유로움같은 웃음을 지으며 말하고는 다시 고개를 숙여 책으로 시선을 옮긴 그에게서 따스함이 뿜어져나오는 듯 했다. 아, 잠깐.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거야. 드립을 던졌어? 처음보는 사람한테? 그것도 호감가는 사람한테? 미쳤지 김남준. 정신 못차리지... 그를 쳐다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급하게 브리또를 마저 먹고는 넘어가지 않는 느낌에 음료수로 억지로 꿀꺽 삼키고는 심호흡을 했다. 정신차리고, 가사 쓰자. 약한 한숨을 쉬었다.
그를 보고 생각났던 감정들과 지금 보이는 풍경, 선선한 듯 포근한 듯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 키워드를 적어가며 가사를 썼다 지웠다 몇 번을 반복하며 그가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집중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져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바라보자 그가 나를 보고있었다. 동그란 눈으로 궁금함을 숨김 없이 드러내면서 나에게 질문할 타이밍을 보는 듯 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눈을 한 번 깜빡 하더니 뭐 쓰는 거에요? 하고 물어왔다.
"아, 그.. 가사.. 를 좀."
"아, 작사가세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우와! 저 좀 봐도 돼요?"
딱히 작사만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프로듀서임을 밝힐 필요도 없었기에 나는 대충 대답했다. 그리고 봐도 되냐는 그의 말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러운데... 그 말은 속으로 삼키며 내 옆으로 와 털썩 앉는 그를 눈으로 쫓았다. 그가 앉을 때부터 나는 향수인지 살냄새인지 모를 달콤하면서도 청량한 향에 나도 모르게 냄새를 맡을 뻔 했다. 이걸 홀린다고 하는 거던가. 내가 뿌리고 나온 향수와는 다른 느낌이었지만, 그가 노트에 적힌 글자를 자세히 보려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일 때마다 두 향수의 향이 섞이면서 오묘한 향을 냈다.
"아, 미안해요. 내가 너무 기댔구나."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와 몸이 닿을까 조금 어정쩡한 자세로 몸을 뒤로 쭉 빼고있는 나를 발견한 그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자세를 고치고 앉아 내 노트를 가져가서 들고 읽는데, 왠지 모를 아쉬움이 밀려왔다. 왜 아쉽지..? 아쉽다? 아쉬운 게 뭐더라? 정말 홀리기라도 한 것일까.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이 쓰이고 머릿속이 어지럽다. 적어뒀던 가사를 보던 그가 조용히 가사 좋다- 하고 중얼거리는 말에 자연스럽게 그의 손에 들려있는 노트를 가져오며 가사는 시처럼 읽어도 좋아요. 하고 말하자 어떻게? 하고 묻는 듯한 그의 눈빛에 살짝 웃으며 목을 가다듬고 천천히, 시를 낭독하듯 가사를 읽어나갔다. 영어가 없는 가사여서인지 더 시처럼 들렸다.
노트에 시선을 두고 읽다가 어때요? 하고 물으며 그를 쳐다보자 그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예쁜 눈이 놀란 듯 동그랗게 뜨이더니 빠르게 고개를 돌리더니 아, 네! 하고는 좋네- 하고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려는건가? 또 다시 밀려오는 아쉬움에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일어나서 자기 자리로 가려던 그가 걸음을 멈추고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러고는, 나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번호 좀 주실 수 있어요?"
"...?"
"아, 싫으면 안 주셔도 돼요!"
내가 쉬운 남자는 아니지만, 처음 만나자마자 이렇게 귀엽고 이렇게 친절하고 이렇게 온 몸으로 사랑스러움을 내뿜고 있는, 이런 좋은 사람을 놓칠 순 없었다. 싫으면 안 줘도 된다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번호를 누르고 통화버튼을 눌러 내 핸드폰에 번호가 뜨게 하고는 통화를 끊고, 연락처를 추가해서 내 이름 세글자를 써넣어 그에게 폰을 돌려주었다. 말없이 그 과정을 마친 나를 멍하니 보던 그는 자기 핸드폰을 가만히 보더니 김남준... 남준씨. 하고 중얼거렸다.
"이름 말해줘야죠."
"아, 제 이름은 김석진이에요."
"김... 석... 진. 됐다. 저장했어요."
"조만간, 연락할게요."
"아, 네."
"저 지금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
번호를 저장하고, 그와 눈을 마주치며 옅게 미소를 짓는데 그가 핸드폰을 보더니 급하게 말을 하고는 가방을 챙겨 달려갔다. 방금까지 포근함이 감싸던 주위에 약간은 쌀쌀한 기운이 감돌았다. 쌀쌀함이 아니라 쓸쓸함인가. 오늘 안에 연락이 안 오면 내가 먼저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며, 나도 짐을 챙겨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일하러 가야지.
*
처음 만난 이후로 몇 번 만나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하다보니 그의 버릇이라고 해야할까?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행동으로 알아버린 느낌이었다. 어딜 가든 뭔가 하나씩 잃어버리거나, 무언가를 부수거나 하는 그를 볼 때마다 이 사람은 힘의 조절같은 걸 잘 못하나보다. 챙겨줘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얘기를 하니 친구들도 자기를 파괴신이라고 부른다며 억울하나는 표정을 짓는 그의 표정이 귀여워서 찍어놓고 싶은 마음까지도 들었다.
그리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같이 밥을 먹고 일어나는데 혹시나 하는 생각에 테이블과 앉아있던 자리를 둘러보자 그가 앉아있던 자리의 바로 옆에 지갑이 놓여있는 걸 발견했다. 딱 보니 아까 계산하고 들어올 때 가방에 안 넣고 그냥 의자에 내려놓은 듯 했다. 어쩜 좋아. 앞으로는 덜렁이라고 불러야겠네. 한숨을 쉬며 지갑을 챙겨 나가자 그가 왜 이렇게 늦게 나왔어요? 하고 묻는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네. 이걸 말을 해 말어. 놀려보고 싶은 마음에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남준씨, 뭐 잊은 거 없어요?"
"어... 뽀뽀?"
"아, 그런 거 말구요!"
뭐 잊은 거 없냐는 말에 뽀뽀라고 대답하는 이 남자. 내가 좋아하는 거 들켰나? 왜 갑자기 이러지? 에이, 그냥 생각나는 대로 던져본 말이겠지. 금세 달아오르는 얼굴에 식겁한 나는 부끄러운 척 일부러 오버하며 얼굴을 두손으로 가리고는 뭐 잃어버린 거 없냐고 다시 물었다.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표정이다. 순진한 건지, 바보인건지... 지갑에 대한 것도 그랬지만 내 감정에 대한 것도 하나도 눈치채지 못하는 걸 보면, 바보인 듯 했다. 하아. 내가 바보를 좋아하다니.
그는 곰곰히 생각을 하더니 드디어 잃어버렸다 라는 단어에 포커스를 맞춘건지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이 있는 걸 확인하고, 가방을 뒤지며 배터리... 충전기... 노트... 하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서야 깨달았는지 아! 하고는 가게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 했다. 급하게 그의 손목을 잡아 끌고 코트 주머니에 넣어뒀던 지갑을 건네주자 처음 봤던 날처럼 옅게 미소지으며 아, 고마워요. 하고 나를 보더니 지갑을 가져가 가방에 넣었다. 왠지 억울해.
"그럼 뽀뽀 해주던가요."
"...어..."
"아, 장난이에요 장난! 왜 그렇게 당황해요-"
"...아니, 누가 장난을 그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해요! 진짜 해줘야 하나 고민 했잖아요!!"
나의 말에 순식간에 온 얼굴부터 귀까지 새빨개진 그의 얼굴이 볼만했다. 놀리는 재미가 있어. 무슨 대답을 해야할지 고르는 듯 머뭇거리는 그를 향해 장난이라고 말하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억울한 듯 누가 그렇게 장난을 치냐며 한번도 보지 못한 표정과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톤의 목소리로 말을 우르르 쏟아냈다. 정말 고민했나봐. 어쩌지. 귀여워죽겠어... 남자끼리인데 뭘 그렇게 놀라지? 순진해, 정말.
"해주고싶어요?"
"아니요! 전혀!!"
"해주고 싶으면 해줘요, 뽀뽀."
"싫.습.니.다."
"정말로?"
"싫어요. 진짜. 진짜로. 안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