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뽀얘기하면서 남준씨를 놀린지도 벌써 일주일 째. 나는 만날 때마다 그의 입술을 바라봤고, 그는 또 놀리냐며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놀리는 것 보다는 도톰한 입술도 너무나도 멋있었고, 그 입술에 닿는 그의 손가락도 멋있었고, 특히 그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그의 목소리가 멋있어서 쳐다보는 건데 그는 그런 건 전혀 모르는 듯 했다. 내일 마침 쉬는 날인데 다짜고짜 데이트를 하자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를 안 보려니 그건 아쉬워서 짧게 메세지를 보냈다.
내일 공원에서 볼래요?
약속시간을 정한 것도 아니라서 그가 언제 올지도 몰랐지만 왠지 모르게 그 역시 나를 처음 만났던 열두시 즈음에 올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나가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빠르게 움직이는 몸 때문에 준비도 빨리 한 김에 삼십분 정도 일찍 공원으로 나왔다. 벤치에 앉아 멍하니 그를 기다리다가 뭐라도 하고 있어야 뻘쭘하지 않을 것 같아 연습하고 있던 대본을 폈다.
"어."
저 멀리서부터 발소리가 들렸지만 일부러 집중하는 척 쳐다보지 않고 있었더니 어. 하는 소리와 함께 우뚝 옆 벤치 앞에 서는 남준씨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러고는 방해하지 않으려는 생각인지 벤치에 털썩 앉아서는 무엇을 하는지 정말로 말도 걸지 않고 있었다. 가끔 귀여울 때가 있다니까. 그가 거기 있는 걸 몰랐던 것 마냥 고개를 들고 바라보고는 놀란 척 언제 왔어요? 하고 묻자 어, 방금요.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굳이 내 옆으로 오라고 하지 않아도 와서 앉을 줄 알았더니,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더니 또 다시 나를 본다. 또 처음 봤던 날처럼 물어봐야하나?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그 말에 살짝 웃은 그가 나를 힐끔 보더니 무언가 말하려고 하는데 내 뒤쪽에서 발소리가 느껴져 돌아보니 할머니 한 분이 걸어오고 계시는 게 보였다.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니 벤치에 앉으시려는 듯 해 나는 대본과 짐을 들고 남준씨가 있는 벤치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도 향수 뿌리고 왔네요? 하고 넌지시 말을 던지고 싶었는데 그가 먼저 향수 냄새 좋다. 하고 슬쩍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달콤하면서 끝에는 시원함이 감도는 게 나와 어울린다고 친한 친구가 선물해 준 향수였다.
"친구가 선물해 준 거에요. 되게 좋죠."
"그 친구 되게 센스 좋네요. 어울려요."
"그쵸. 뭐라더라. 달달하다가 차가운 게 딱 저래요."
"차가워요? 석진씨가?"
"그럼요! 제가 좀, 차가운 면이 있거든요-"
"아, 그래요...? 앞으로 유심히 봐야겠네요."
그와 얘기하는 동안은 몰랐는데, 말이 끊기자마자 귓가에서 앵앵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흠칫하고 둘러보니 가까이에 벌 한 마리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쩌지? 손으로 휘휘 저으면 혹시나 공격이라 생각하고 쏠까봐 무서워서 그러지도 못하겠고 으으 소리를 내며 벌을 피하다보니 남준씨에게 살짝 기대게 되었다. 스킨쉽이고 뭐고 지금은 신경 쓸 새도 없었다. 빨리 가라 벌아 제발...! 남준씨의 어깨에 손을 얹자 남준씨가 왜요?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하며 대답하려던 나와 그의 입술이 서로 맞닿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피할 새도 없었다. 도톰한 입술과 나의 입술이 닿으며 말랑한 느낌이 느껴지고 깜짝 놀라서 고개를 뒤로 쑥 빼자 그의 눈이 커졌다.
"...아."
"어..."
둘 다 아무 말도 못하고 서로의 눈만 바라보다 자연스럽게 그의 입술을 바라본 나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급하게 그와 떨어져 벤치 끝자락에 앉았다. 끈질기게 주위에서 맴돌던 벌은 어느샌가 사라져버렸고, 나는 어쩌다보니 그와... 뽀뽀를 했고,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생각하고 있다. 머릿속이 하얗다. 어쩌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보면 이미 얼굴 전체가 빨개져있겠지. 힐끔 그를 바라보자 그는 손등으로 자기 입술을 가리고는 귀까지 새빨개진 얼굴로 나를 힐끔힐끔 보았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또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벌떡 일어나서는 화장실 갔다올게요!! 하고 어딘가로 뛰어가버렸다.
"저 총각 많이 급했나보네..."
"그러게요, 막 뛰어가네요."
아, 덥다. 자연스럽게 나온 말과 함께 손부채질을 하며 그를 기다렸지만, 남준씨는 옆 벤치에 앉아계시던 할머니가 자리를 뜬 후에야 나타났다. 저 멀리서 걸어오더니 옆 벤치 앞에서 머뭇거리기에 어디에 앉나 한 번 보자. 하는 생각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결국 그쪽 벤치에 앉아버렸다. 뭐라고 말을 건넬까. 이 어색함을 빨리 깨버리고 싶은 생각과 그를 놀리고 싶은 생각이 부딪혔다.
"사고였어요. 그쵸."
"ㄱ.. 그렇죠. 사고였죠."
"아니 근데, 왜 도망갔어요."
"아... 진짜, 화장실 가고싶었어요 저."
"흐응..."
사고였다는 말에 버벅이며 대답하는 걸 보니 아직도 부끄러워하는 것만 같아 더 놀리고 괴롭히고 싶어졌다. 당황한 그의 표정이, 그의 시선이 한 곳에 있질 못하고 움직이는 걸 보고있자니 웃음이 새어나왔지만 꾹 참았다. 그리고 웃음이 나오는 것과는 상관없이 계속 입술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 그의 손이 신경쓰였다.
"근데, 석진씨."
"네?"
"그... 입술이 참. 말랑말랑하네요."
"...네...?"
"아, 아니에요."
이럴 때는 오히려 다른 얘기로 끌고나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남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오해하게 하는데에 뭐 있는 것 같아. 입술을 가리고 있는 손, 부끄러운지 계속 바닥만 보고있는 눈, 푹 패인 보조개, 그리고 나에게 입술이 말랑말랑하다며 말을 하는 저 입술. 하아,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게 이 사람은 주위 사람들을 보는 시선과는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다.
"남준씨."
"네?"
"일부러 뽀뽀했어요?"
"아니에요!"
"아... 그-래요...?"
"아니라니까요!!"
"그렇구나- 알았어요."
"진짜 아니에요! 느낌은 좋았는데...! 일부러 한 건 아니에요, 진짜."
일부러가 아니라는 말에 놀려보려 더 추궁해보자 억울한 듯 또 우르르 말을 쏟아놓는다. 자기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걸 상대방이 무시하거나 모르는 척하면 하고 싶었던 말을 우르르 쏟아놓는 거. 너무 귀여운 버릇 아닌가? 거기다 설명을 포기한 듯 한숨쉬는 것 까지. 힘이 쭉 빠졌는지 축 쳐져 있는 어깨를 보니 또 다시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나와 느낌은 좋았는데, 는 뭐에요? 하고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묻자 그의 얼굴이 또 붉어졌다.
*
얘기의 화제를 돌려 다른 얘기를 한참동안 하고, 같이 웃고 떠들다보니 어느새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어 공원 입구로 천천히 같이 걸었다. 말없이 나란히 걸으며 남준씨의 발과 내 발을 번갈아가며 보는데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어 그를 보니 내 얼굴을 기억하려는 듯 가만히 내 얼굴을 구석구석 보고있었다. 뭐에요- 뽀뽀해주려구요? 하자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더니 잘생겨서 그래요, 잘생겨서. 하고 다른 곳을 봤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또 다시 내 얼굴을 가만히 보고있길래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을 툭 던졌다.
"그만 좀 쳐다봐요, 입술 닳겠네."
"...닳는 김에, 뽀뽀해도 돼요?"
"...?!"
"뭘 그렇게 놀라요- 장난이에요, 장난."
"...아닌데... 아닌 것 같은데..."
"자꾸 그럴거에요? 진짜 확 뽀뽀해버린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 했다. 이게 심쿵인가. 유행했던 노래 중에 그런 가사가 있었지. 한순간 머릿속에 그 노래가 재생됐다가 금세 사라졌다. 눈이 확 커지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쳐다보고 있자 장난이라는 말을 한다. 이거 내가 저번에 했던 거 그대로 받는 기분인데. 지기 싫어서 의심스럽다는 듯한 말을 던지자 남준씨가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뒤로 고개를 안 뺐으면 닿을 뻔 했어. 어, 어..?! 아... 내 엉덩이...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에 앞서 걷고있던 남준씨가 그제야 돌아봤다. 이씨... 잔디밭이라고 해도 꽤나 아파서 엉덩이가 얼얼했다.
"자요. 잡아요."
남준씨가 손을 내밀었다. 지금 누구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하는 말은 마음 속에 꾹꾹 눌러담아두고, 그 든든해 보이는 손도 못 본 체 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앞질러 걸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가 달려와 내 어깨에 손을 얹더니 엉덩이를 툭툭 때렸다. 깜짝이야. 놀라서 나도 모르게 그의 손목을 잡아버렸다.
"어머, 어딜 만져요!"
"아니, 잔디가 붙어서."
"...말을 해주지."
장난스러운 나의 말에 어떻게 받아칠지 몰라 머뭇거리던 그는 사실대로 잔디가 붙어서 그랬다며 자기 손에 묻은 흙을 털었다. 괜히 머쓱해져 말을 해주지. 하고 그의 팔을 툭 치자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웃는 모습에 나도 같이 웃어버렸다.